안녕하세요, nowrun.net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블로그를 이끌어갈 주인장, 우런입니다.
첫 글을 시작하며, 제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수많은 직장인의 일기장이 될 이 공간을 열게 되었는지 제 투박하지만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20년 차 팀장으로 일하며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리딩하고 있지만, 제 시작은 누구보다 평범하고, 어쩌면 남들보다 훨씬 더 소심했습니다.
평범함 속에서 이어받은
아버지의 ‘끼’
저는 그리 부유하지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근면 성실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모나지 않게 자랄 수 있었죠.
특히 제 아버지는 넘치는 예술가 기질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트럼펫과 기타를 연주하시고, 노래도 잘하셨으며, 사물놀이의 상쇠(꽹과리를 치는 수석 연주자)를 맡으실 정도로 흥과 끼가 넘치셨죠. 철저한 봉급생활자로 사셨지만 가슴 속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뜨거웠던 아버지. 저에게도 분명 그 피가 흐르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저는 예술 대신 취업이 잘 된다는 현실적인 전공을 선택해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나마 내가 재밌어하는 화학계열인 ‘화학공학과’였습니다.
눈 마주치기도 두려웠던
지하철 안의 청년
대학에 입학했을 당시의 저는 지독하게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감수성은 풍부한데 숫기는 없어서, 등하교할 때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그래서 늘 모자를 코끝까지 푹 눌러쓰고 땅만 보며 다녔죠.
어느 정도였냐 하면, 대학교 1학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 때 우연히 조가 되어서 만났던 몇 명의 친구들하고만 1년 내내 어울렸습니다. 새로운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 주위에 벽을 친,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던 셈입니다.
그러던 1학년 겨울방학, 방 안에 누워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강하게 스쳤습니다.
“내 인생, 계속 이렇게 숨어 지내듯 살아도 괜찮은 걸까?”
그날 이후, 저는 제 삶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작은 반란을 시작했습니다. 방학 내내 학교 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해 심리학과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대화를 나누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글로라도 먼저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2학년이 되어 맞이한 신입생 OT, 제 인생의 첫 번째 성격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책으로 머리에 집어넣은 인간관계를 세상에 던져본 순간이었죠.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귀걸이 3개를 양쪽에 나눠 끼고 화려한 힙합 패션을 한 채, 세상에서 가장 활발하고 유쾌한 선배로 신입생들 앞에 섰습니다. 후배들은 저를 ‘원래부터 엄청나게 밝고 마당발인 선배’로 기억하더군요.
자신감이 붙자 과 동아리 회장까지 맡게 되었고, 군대 가기 직전인 1999년 인터넷 초창기에는 밤을 새워 독학으로 동아리 홈페이지를 만들어 후배들에게 선물하고 입대를 했습니다. 소심했던 청년이 사람을 좋아하고, IT 기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한 것입니다.
주야 2교대 라인에서 배운
‘땀의 가치’
제 고향은 안산입니다. 부모님이 수입상품점, 문방구 등 여러 사업을 하시다 실패하시고 쓰라린 마음을 안고 봉급생활자로 도피를 오듯 터를 잡으신 곳이었죠. 두 분 모두 안산 반월공단의 생산직으로 밤낮없이 일하셨습니다.
그 부모님의 무거운 땀방울을 매일 보고 자란 덕에, 저 역시 대학 시절 수많은 공장 아르바이트를 거쳤습니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반월공단에 있는 화학공장에서 방진 매트와 반도체 트레이를 만드는 고된 일을 했고, 군대에 가기 직전인 2000년 4월에는 삼보컴퓨터 안산공장에서 주야 2교대로 라인을 타며 컴퓨터를 조립했습니다.
군대 역시 21사단 백두산부대 공병대대에서 지뢰병과 미장공(시멘트를 바르는 작업)을 담당하며, 대대 ‘지뢰왕’과 ‘미장왕’ 표창을 싹쓸이해 포상휴가를 나올 정도로 무엇을 하든 진심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전역 후 복학하기 직전에도 서울우유 안산공장에서 PET병에 우유를 담는 주야 2교대 공장 알바를 이어갔습니다.
“대학 2학년까지 마쳤는데…”
시야를 넓히다
우유 공장에서 차가운 PET병을 나르며 밤샘 근무를 하던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이 공장에서 일하신다고 해서, 명색이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는 나까지 평생 공장 알바만 전전해야 할까? 내 시야가 너무 안산 반월공단 안에만 갇혀있는 건 아닐까?’
더 넓은 비즈니스의 세계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 길로 다른 알바를 찾다가 안산테크노파크(현재 경기테크노파크)에서 주관하는 2002년 벤처박람회 단기 인력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팀장님, 대리님들과 관계를 정말 잘 맺어둔 덕분에 방학 때마다 부름을 받아 귀한 일을 도왔습니다.
3학년으로 복학한 뒤, 또 하나의 거대한 벽을 마주했습니다. 제가 영어를 너무나도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영어 회화 교육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죠.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부모님께 무작정 휴학계를 내겠다고 말씀드린 뒤, 경기테크노파크의 인연을 이어가며 1년 동안 계약직처럼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당시는 벤처 붐이 일던 시대였습니다. 산업자원부 산하의 경기테크노파크에서 진행하는 벤처기업/중소기업 지원 사업들, 신기술창업보육사업 등을 가장 가까이서 서포트하며 ‘회사가 어떻게 정부의 지원을 받고, 비즈니스가 어떻게 구조화되는지’를 눈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제가 대기업에서 ‘사업기획’을 하는 데 엄청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한양대 사외교육원에서 영어회화 수업을 들었습니다. 조금씩 귀가 트이자 안산의 중급 영어회화 동아리(AIEC)에 당당히 인터뷰를 보러 갔고, 떨어졌습니다…
이렇게는 안되겠다 싶어 부모님께 “1년 더 휴학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겠습니다.” 제가 1년간 테크노파크에서 피땀 흘려 번 돈 1,000만 원에 약간의 도움을 더해 캐나다로 날아갔습니다. 밴쿠버 ILSC 학원에서 3개월, 에드먼튼 알버타 주립대학 인텐시브 코스에서 7개월을 버텨내며 원 없이 영어를 부딪쳤습니다. 귀국 후, 저는 그 안산 영어회화 동아리를 무려 7년 동안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가 되어 있었습니다.
지독한 취업난,
그리고 ‘K社’와의 운명적인 만남
4학년을 마치고 맞이한 졸업반, 세상은 지독한 취업난이었습니다. 우리학교는 S社가 재단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저는 S社와 인연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K社’라는 회사가 학교로 리쿠르팅을 왔고, 저는 이 회사에 지원해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이는 제 커리어에 신의 한 수였습니다. 만약 제가 삼성이나 LG 같은 다른 대기업으로 갔다면, 화학공학 전공을 살려 지방 사업장의 생산 관리나 기술직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했을 확률이 99%였습니다. 하지만 K社는 특이하게도 ‘영업 직무’에 화학공학 전공자를 뽑았고, 덕분에 저는 본사로 출퇴근하는 대기업 ‘기술 영업(Technical Sales)’ 사원으로 직장 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사람 눈도 못 마주치던 소심한 아웃사이더가, 매출액 5천억원의 대기업 영업사원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마주해야 하는 ‘1500도짜리 빨간 쇳물이 끓어 넘치는 거친 공장 단지’였습니다. 그리고 제 직장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첫 번째 거대한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